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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광순 한의사를 알게 된 것은 2002년 이유명호 한의사를 통해서다. 당시 여성운동가들의 가장 큰 목표는 호주제 폐지였고 그 최전선에 고은광순이 있었다. 당시 내 솔직한 심정은 '뭐 저런 쌈닭이 다 있지'였다. 논쟁의 중심에서 격렬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던 그이가 곱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2남 4녀의 4녀로 태어난 그이는 남아선호 사상의 피해를 온몸으로 겪었다. 김치를 안 먹는 오빠가 좋아하는 달걀부침, 바삭한 멸치볶음, 콩나물무침을 위해 4명의 자매들은 멸치 머리를 떼고 배를 갈라 똥과 가시를 발라내고, 콩나물의 꼬리를 따야 했단다.

초음파가 있었으면 어쩌면 태어나지 못했을 넷째 딸인 그이는 한의사가 되었다. 한의사인 그이에게 '아들 낳는 한약을 지어달라', '딸을 낙태할 수 있는 약을 지어달라'며 찾아오는 여성들을 보며 호주제 폐지 운동에 뛰어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2005년 2월 '호주제 불합치 판결'을 이끌어내기까지 그이는 정말 열심히 가부장제를 고수하려는 사람들과 유림을 상대로 싸웠다. 호주제 폐지 운동을 하며 가부장 문화에 찌든 남성우월주의자를 비판하는 연재를 할 때 얻은 별명이 '도끼부인'이라고 한다. 도끼부인 고은광순은 호주제 폐지 이후 본업인 한의사로 돌아갔다.

2010년경 그이는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모시려 공주 갑사로 내려가 집을 짓고 약초를 심고 텃밭을 가꾸며 산다고 했다. 반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2012년에 조용히 인생 후반기를 준비하려 충북 옥천군 청산면으로 아예 귀촌을 한다. 우연히 도종환 시인이 보내 준 책으로 청산이 동학혁명 당시 본부가 있던 곳이며 해월의 딸 최윤이 아들 정순철을 낳아 기른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성과 어린이 모든 생명 안에 깃든 한울인 시천주 사상에 감동한 그이는 13권의 여성동학다큐소설을 구상하고 열세 명의 여성이 각 한 권씩 다큐소설을 쓰기로 한다. 그이가 최윤의 삶을 그린 1권 <용담할매>편을 집필한다.

이후 그이는 미국의 군사주의에 맞서 2015년 6월 25일부터 '평화어머니회'를 만들고 미대사관 앞 '평화시위'와 '평화를 춤추자'라는 평화운동을 시작한다. 서울과 청산, 미국 워싱턴, 오키나와 등을 오가며 평화운동을 하느라 바쁘게 살아가는 그이는 청산에서 지친 몸과 마음에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채우곤 했단다. 그이가 청산에 뿌리 내리려는 이유는 청산이 동학의 본거지였고 용담할매 최윤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이가 터를 잡은 청산면 삼방리는 차로 5분 거리인 두 개의 마을 장녹골과 가사목으로 나누어져 있단다. 두 마을을 합해 40여 세대, 60여 명이 조금 넘는 자그마한 마을이란다. 그이는 2020년 충북도에서 지원하는 행복마을사업 1단계 300만 원을 지원받아 마을 사람들과 행복마을 가꾸기를 시작했다.

마을에 기록된 주민들의 삶

 
▲ 도끼부인의 달달한 시골살이 
ⓒ 모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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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부인의 달달한 시골살이/ 모시는 사람들>는 2020년 행복마을사업 1단계에 선정되어 3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아 마을공동체 사업을 펼치며 경험한 다양한 변화와 달라진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말한다.
 
처음 충북도로부터 300만 원을 지원받고 행복마을 1단계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대체 누가 이런 생각을 했지? 그 과정을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글로 남기지 않으면 소중한 이야기들이 어느 결에 휘발되어 사라질 테니까... 동네 어르신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잊히고 마는 것처럼...
 
그이는 행복마을 사업을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행복마을잔치, 마을 청소, 저수지 둘레 나무 심기, 벽화 그리기, 요가 수업, 2단계 발표를 위한 준비작업 등을 한겨레 주주통신원으로 '한겨레 온'에 기고했다. 책은 그 기고문을 정리해 엮은 것이다.

그이는 마을 사람들과 지난해 4월부터 6개월 동안 행복마을 사업을 펼쳤다.

처음으로 남녀 모두 살구색 앞치마를 입고, 공동으로 마을 청소를 하고, 저수지 둘레에 나무를 심은 뒤 둘러앉아 먹던 김밥과 주먹밥은 꿀맛이더란다.

두 번째 사업은 벽화 그리기다. 먼저 허물어진 벽을 벽돌과 황토로 메우고 시멘트를 바른 뒤 흰 페인트를 칠해 밑바탕을 마련했다. 마을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의좋은 남매 이야기, 포도나무, 해바라기, 능소화, 연꽃, 동학농민을 벽화로 그려냈다. 주말에만 모이는 사람에게는 빈 동그라미를 마련해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그림마다 삼방리 마을 주민들의 삶과 애환, 희망이 고스란히 담겼다.

살아 숨 쉬는 가족사, 마을 역사, 동학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 과거와 현재 미래의 희망까지 벽화에 담아냈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고 계절이 바뀌어도 시들지 않는 것은 벽화 속 연꽃, 능소화, 해바라기만이 아니다. 온몸으로 역사를 살아내고 자식들을 길러낸 이 땅 어머니들의 삶, 동학의 개벽 세상도 고스란히 담겨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끌고 새로운 삶의 동력이 되고 기쁨과 희망이 되었다.

벽화를 통해 새로운 서사도 탄생했다.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형제, 자매, 이웃으로 확대되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냈다. 욕심이 많아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와 천국에 간 착한 딸 이야기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을 모두 구해오는 착한 어머니 이야기로 바뀌어 벽화에 담겼다. 포도 덩굴 그림이 그려진 벽에는 동네 할머니와 포도를 따 먹는 아이가 등장한다. 밋밋하다며 사람을 그려 달라는 할머니의 요구에 따른 것이란다.

서로 만나며 시시콜콜 알게 된 할머니의 삶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양면 코팅을 한 뒤 마을 잔치 때 선물로 건네고 한 부를 더 인쇄해 마을회관에 마을의 역사로 남겼다고 한다. 삼방리에 터를 잡고 살아온 왕언니들은 세상을 떠나도 사라지지 않고 역사가 되어 마을회관에 남게 된 것이다.
 
봄에 시작되었던 행복마을 만들기 사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예년 같으면 신청했던 20개 마을이 한곳에 모여 경연대회를 하기도 했다지만, 코로나 때문에 불가. 9월 중순에 현장심사를 하고 10월 초순에 미리 찍어 놓은 영상과 짧은 ppt 발표로 대체한단다. 마지막 리더 교육 시간에 추첨을 통해 발표 순서를 정했다. 20개 마을 중에 9번을 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는데 뽑은 종이를 펴보니 9라고 적혀 있다. 오오, 저수지 신령님... 계속 돕고 계신 건가요? 에헤라디여~ 감사합니다. -116쪽
 
1단계 사업에 대한 평가를 거쳐 스무 개 마을 중 12개 마을을 선정해 2단계 마을 사업을 지원한다고 한다. 삼방리는 우수한 평가를 받고 2단계 마을 사업에 선정되었단다. 지원비는 무려 10배 늘어난 3000만 원. 지금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사업 구상이 한창이란다.
 
행복마을로 선정되어 2단계로 올라섰으니 새로운 마을 사업을 하겠지요. 함박웃음과 더불어 커져가는 행복이 눈에 선합니다. 너나없이 온 마을이 한 가족처럼 정겨운 마을. 서로 보듬고 위하는 마음들로 사랑이 그득한 마을, 기쁨이 넘쳐 나고 웃음이 샘솟는 마을 삼방리... 봄부터 지켜본 삼방리의 따뜻한 온기에 제 마음도 따스해집니다. 하여, 조만간 정 찾아 행복 찾아 삼방리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습니다. - 142쪽

자신을 '고은부인'이라고 불러달라며 아무리 정정을 해줘도 '도끼부인'으로 부르길 고집하던 이들에게 달달한 시골살이를 보여주고 싶었다던 고은광순, 그이는 늘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개척자이자 평화의 여전사다.

그이는 강연을 할 때 주제와 상관없이 마지막에 다음 이유로 '파도타는 여인'을 보여준다고 한다.
 
인생을 스포츠에 비유하면 파도타기와 같다. 과거의 파도는 가 버렸으니 아무 의미 없다. 미래의 파도 역시 오지 않았으니 두려워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 현재의 파도를 감사하여 즐기다 보면 기술이 늘어 미래의 집채만 한 파도도 즐길 수 있다. 부디 억울한 과거와 이별하시고 지금, 여기의 일상을 감사하며 즐기시라. - 106쪽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선  현재의 그 자리에 행복은 이미 와 있기에. 

60대 막내가 100대 왕언니와 함께 풍물을 치고, 그림을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내며 웃고 울다 보면 어느새 행복이 가슴으로 느껴질 것이다.

2단계 행복마을 사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귀촌, 귀농인, 원주민이 한데 어우러져 삼방리에서 일구는 일상이 평화와 분홍빛 설렘으로 가득하길. 올해가 지나면 또 다시 엮여질 행복한 이야기를 기대하며 응원의 손뼉을 쳐본다.

도끼부인의 달달한 시골살이

고은광순 (지은이), 모시는사람들(2021)


태그:#행복마을, #청산면 삼방리, #고은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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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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